2017년 초단편 소설집 <회색 인간>이 세상에 나왔을 때 ‘이걸 소설이라고 해도 되나?’라는 의구심이 떠다녔다. 당시만 해도 인터넷 사이트에서 인기 얻은 초단편 소설을 한 번쯤 휘잉 돌고 가는 바람일 것으로 예상한 사람이 많았다. 8년이 지난 지금 30만 부를 돌파한 <회색 인간>은 100쇄 기념 에디션을 발간하며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.
김동식 작가는 주민등록증이 나온 17세에 독립해 바닥타일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으니 따로 문학 공부를 한 일이 없다. 주물공장에서 10년 넘게 일하던 중 온라인 커뮤니티 공포 게시판에 소설을 올리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1년 후 <회색 인간>, <세상에서 가장 약한 요괴>, <13일의 김남우>를 동시에 출간했다. 그동안 <양심고백>, <밸런스 게임> 등 총 10권의 소설집을 펴내면서 ‘초단편’이라는 장르를 확고하게 다졌다.
김동식 작가는 어느 인터뷰에서 초단편을 ‘말로 들려줄 만한 이야기가 담긴 짧은 글’이라고 표현했는데 <회색 인간>에 실린 24편의 초단편은 일반적인 단편소설의 3분의 1 혹은 4분의 1분량이다. 각각의 짧은 이야기 속에 강렬한 스토리를 담았다는 특징이 있다.
짧은 이야기인 만큼 허를 찌르는 반전이 눈길을 끈다. ‘소녀와 소년,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가?’는 핵전쟁으로 폐허가 된 세상을 그린다. 서쪽으로 가서 벽 너머 세계에 가면 살 수 있다. 숨지기 전 엄마는 소녀에게 마지막 남은 초코바를 주면서 “참을 수 없을 만큼 배가 고파지면, 그때 먹어”라는 말을 남긴다. 몇 명의 사람과 함께 벽 너머 세계로 향하던 소년은 밤에 식량을 훔쳐 무리를 이탈한다.
드디어 벽 앞에 도달한 소녀, 그때 소년도 도착한다. 벽 안으로는 한 명만 들어창립기념일선물갈 수 있다. 둘 중 누구를 받아들일 것인지 회의를 할 때 배가 고픈 소녀가 초코바를 꺼내 소년에게 반을 건넨다. 그 모습을 본 벽 안의 사람들은 과연 누구를 선택할까. 대개 소녀일 거라고 예상하지만 소년을 받아들이기로 한다. 이유는 소녀가 ‘초코바 봉지를 아무렇지도 않게 바닥에 버렸기 때문’이다.
운석의 주인’에도 기발한 스토리가 담겨 있다. 약 1년 뒤 운석이 지구와 충돌하면 지구 생명의 90%가 멸종될 것이라는 예견이 나와 지구가 혼란에 빠진다. 그런데 한국의 김남우가 여행을 갈 때마다 운석이 그 나라로 떨어질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. 우여곡절 끝에 김남우를 로켓에 태워 우주로 보내기로 한다. 김남우의 가족들은 슬퍼하지만 지구인 전체가 기뻐하는 가운데 로켓이 발사되었고, 그 순간 지구가 움직이기 시작한다. 김남우를 따라. <회색 인간>을 쓰기 전까지 김동식 작가는 평생 읽은 책이 열 권도 안 되고, 네이버에서 ‘글 쓰는 법’을 검색해서 기승전결 법칙을 깨달았다고 한다. 초창기 인터넷에 글을 올릴 때 맞춤법 오류가 많았으나, 독자들이 댓글에 남긴 지적을 교과서 삼아 하나하나 고쳐나갔다.
독특한 상황과 예기치 못한 반전이 이어지는 소설집 <회색 인간>은 재미있으면서 섬뜩하고, 상상을 초월하면서도 인간 냄새를 풍기는 이야기들을 줄줄이 선보인다.
‘회색 인간’에서는 한 대도시에서 만 명의 사람들이 순식간에 땅속 ‘지저 세계’로 떨어진 이야기가 펼쳐진다. 그들에게 ‘도시 하나만큼의 땅을 파내면 무사히 지상으로 돌려보내 주겠다’는 미션이 떨어진다. 지급받은 것은 곡괭이 하나, 음식이라곤 진흙 맛 나는 말라비틀어진 빵이 고작이다. 끝없이 흙을 파내느라 날린 먼지 때문에 회색이 된 인간들, 그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.
요즘 출산율이 낮아지면서 국가 소멸 얘기까지 나오는 마당이다. ‘아웃팅’에서는 자꾸만 줄어드는 인구 때문에 인류가 인조인간을 창조한 이야기를 선보인다. 사회 속으로 녹아든 인조인간이 너무 감쪽같아 그 누구도 차이점을 알아채지 못한다. 심지어 본인조차 인조인간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도 있다. 실제 인간과 인조인간이 함께 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.